연혁 및 지명유래

반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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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구동은 숙종 34년(1708년)에 구교동리·반구정 서부리·반구정동부리·서낭당리의 4개마을로 갈라져 있었다. 영조 41년(1765)에는 구교동리·서부리·동부리·해성리·동령리로, 정조 때는 구교리·서부리·동부리·내서낭당리·동령리, 고종 31년(1894)에는 구교동·구정동·동부동·내황동, 1911년에는 구교동·서부동·동부동·내동동으로 갈라져 있었으나 1914년의 행정구역개편 때 이를 합하여 반구리라 하였다.

반구정

  • 이곳을 임진왜란 때는 구강이라 하던 곳이다. 동천이나 태화강의 토사가 오늘처럼 퇴적되지 않아 한 반도를 이루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구강이라 하는 이름이 생겼던 것이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이었던 퇴사제 이응춘이 이곳에 정자를 세워 그 이름을 반구정이라 하였으므로 이것이 지명이 되어 숙종때는 반구정 서부리와 반구정 동부리, 1894년에는 구정이라 하다가 1911년에 와서 동부와 서부로 갈라졌다가 1914의 행정구역개편 때에 반구리로 되었다. 서부와 동부라 하는 것은 반구정이라하던 정자를 중심하여 그 방위에 따라 붙인 이름이다.

서원

  • 1894년에서 1914년 까지의 모든 기록에는 동부동으로 되어 있었다. 동부라 하는 것은 반구정이란 정자를 하여 그 동편에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게 된 것이다. 서원이라고 한 이름이 언제부터 생긴 것인지는 소상하게 알 수 없는 일이나 이는 구강서원이 있었던 마을이라는 데서 유래하였다. 서원이라 하는 것은 향교가 공립 고등교육기관이라 할 수 있다면 사립 지방 고등교육기관이 되는 것이다. 효종 10년(1659)에 배 두첨 이하 11명의 유림들이 출자하여 서원건립을 발의하니 많은 사람들이 뒤에 호응하여 이를 금곡을 식리하여 오다가 현종 8년 가을에 학성 서쪽에 터를 잡아 일부 건물이 이루어 졌으나 이듬해에 불이 나서 소실하고 말았다. 그후 숙종 4년(1678)에 지금의 서원쪽에 다시 집을 짓고 숙종 5년에 정몽주·이언적의 양현을 모시게 되었다. 그로부터 15년 뒤인 숙종 20년(1694)에 사액이 있었으며 고종 8년(1871)에 이르러 폐철하고 양현의 위패를 뒷산에 묻어 묘를 짓고 지금도 양력 9월 9일에는 제사를 지내고 있다.

내황

  • 내황은 서낭당이라 하던 곳이다. 서낭당이라 하는 것은 이미 선조때부터 불러오던 지명인데 정유재란 때에 이곳에 있던 왜군을 경상좌병사 성윤문이 이를 격파한 기록이 선조실록에 나타난다. 또 구강서원창건기를 보면 숙종 1년(1675)에 서원을 지을 재목을 벌채하여 이곳으로 운송하여 왔다고 하였는데 그때의 기록은 내황포라 하였다. 기록상으로 보면 선조때 이래 성황당리 해성리 내성황당리 해성리 내황리 내동리 내황으로 변천하여 왔다. 성황당이라 한 지명은 서낭신을 모신 성황당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이 지명화되어 된 것이며 내황이라 함은 안쪽 성황당마을이라는 뜻이 된다. 울산에는 똑같은 성황당이란 마을이 두곳이나 있었는데 다른 한곳은 성암동에 있었다. 성암동의 개운포영성 안쪽에 있었던 마을은 성내라 하였고 바깥마을은 이를 성황당이라 하다가 외성황당 외황진이라고도 하였다. 이러한 것을 미루어 본다면 울산본부를 중심하여 성암동에 있었던 성황당은 외황, 반구동에 있는 성황당은 내황이라하여 서로 내·외로 대칭한 것이었다. 성암동 성황당은 바로 개운포에 있었던 것이니 신라말에 처용의 출현을 본 용신의 성역이었으며 반구동의 성황당은 계변천신이 하강한 천신의 성지인 것이다. 어쩌면 이 두곳은 주서낭신과 같은 격으로 받들었기 때문에 유독 여기에만 성황당이란 지명이 남아 전해온 것으로 생각 되는 것이다. 내황에는 성황당이 3곳이나 있었다고 한다. 수리사업으로 제방을 막기전 까지는 동천의 수로가 내황과 반구정 사이로 흐르던 것을 제방을 축조하여 지금처럼 된 것이라 하며 내황은 삼각주로 된 섬이었다 한다. 이곳에는 오래전부터 내황장이 있었으나 호계장이 되고 부터는 폐지되고 말았다. 영조 30년(1754)의 기록에 내황장이 나타난다.

구교동

  • 구교동(현 반구2동)은 신라 말까지는 개지변(皆知邊) 또는 계변성(戒邊城)으로 불리어 오다 고려초에는 신학성이라 하였다. 고려 태조 13년(서기 930년)에는 이곳을 흡수 삼국을 통일후 하곡, 동진, 우풍 3현과 동안군을 합하여 흥례부(興禮府)로 승격시켜 치소(治所)를 이곳에 두었다. 그후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면서 태조(太祖)는 일향 일향교(一鄕 一鄕校)설치 정책에 따라 이 주변일대를 울산향교를 지어 교육하였다. 임진왜란(壬辰倭卵)으로 소실되었던 것을 다시 복원(復元)하여 유지하여 오다가 효종3년(서기 1652년)에 중구 교동 171-1번지로 옮겨 지었다. 그 후로 마을 이름을 구교동(舊校洞)이라고 350년동안 부르고 있다.

반구정 왜성

  • 서원 뒷산에 왜군의 한 지성이 있었다. 정유재란 때에 조명연합군이 이를 격파 하였다.

해정리

  • 내황을 숙종 때에 서낭당리라 하다가 영조 때와 1894년경에는 해성리라 하였다. 해성이라함은 서낭당을 약칭한 것은 틀림없으나 이는 동해지방의 서낭신이 대개 해랑신이었기 때문에 해성이라 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동령리

  •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으나 아마 지금의 서원을 그렇게 부른 듯하다.

내동동

  • 1911년에 한동안 내동동이라 한 것은 내황과 동령을 합한 마을 이름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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