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산동
복산동의 유래를 말함에 복천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기도 하였으나 이는 이 냇가에 맹인들의 회관이 있어서 점치는 곳이었으므로 복천이라 한 것이라 한다. 복산이라함은 光明山 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자 한다. 우리 예맥족들이 해뜨는 동방을 찾아 한반도로 흘러오면서 그들이 사는 곳에는 도처에 光明을 뜻하는 지명을 남겨놓았다. 이는 하늘을 우러러 보는 그들의 관념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다.
노상동
- 지금의 제일아파트(옛 제일중학교) 앞에서 울산초등학교 앞에 이르는 길의 윗쪽에 있는 마을이라하여 노상이라 하였으며 그 아래쪽을 노하라 하였다.
동박
- 울산읍성의 동문이 지금의 옥교동사무소 북서쪽 (옛 울산시장 관사 부근)에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서부 복산과 학산을 동문밖 또는 동밖이라 하였으며 또한 줄다리기를 할 때 울산초등학교에서 남쪽으로 갈라서 동쪽을 동부라 하였고 서쪽을 서부라 하였다.
사단등
- 복산초등학교 북편의 등(嶝)을 사닥등이라 한다. 이는 사단등이 와전된 말이다. 조선시대에 손골을 내려다 보는 곳에 여제단이 있어서 여기에서 여귀들을 제사 지냈다. 이로 말미암아 이곳을 사닥등이라 하였다.
복천
- 북정과 복산의 사이를 흐르는 내를 복천이라 한다. 동밖 복천 가에 맹인들의 회관이 있어서 여기에서 맹인들이 복점을 쳤음으로 이 내를 복천이라 하였다.
복천둑다리
- 동밖 복천에 일석으로 된 넓고 큰돌 두 개를 이어 다리를 놓은 것을 복천둑다리라 하였다. 울산교가 가설되기 전 까지는 보름날 달밤에 자기 나이수대로 이곳에서 다리 밟기를 하였는데 동부사람들이 여기에서 밟고 서부사람들은 옹수골 복주내 다리를 밟았다.
손골
- 큰못 북쪽의 골짜기이다. 좁은 골짜기이기 때문에 손골이라 하였다. 서부 복산과 북정 사람들이 말랑이를 넘어 여기에서 빨래하는 빨래터였다.
새싯골
- 지금의 울산성당 서쪽을 새싯골이라 하였으며 손골에서 흘러오는 내를 새싯골 도랑이라 하여 동쪽에 살던 복산과 학산 사람들의 빨래터였다.
큰못
- 지금의 복산경로당(옛 복산동사무소)이 자리잡은 주변의 넓은 지역은 큰못이라 하던 못터이다. 물을 빼고 울산읍의 공설운동장으로 쓰던 곳이었고 못둑은 옛 채봉터이다. 읍지에 나타나는 서제제(書劑提)가 바로 큰못인 것으로 추정된다.
풍류골
- 손골의 북쪽이다. 동부사람들의 야외 놀이터였던 곳이다. 물과 산이 좋아 놀만한 곳이었다.
당고개
- 울산성당의 북동쪽 고갯길이다. 개변고개를 넘어 병영으로 가는 길의 고개이다. 서낭당의 역할을 하였던 고개이며 지나는 사람들이 돌을 쌓아 올렸다.
작은못
- 당고개의 동쪽에 있었던 못이다. 큰못에 대한 대칭으로 작은못이라 하였으며 한동안 우시장이 되었다가 지금은 택지가 되었다.
도화골
- 울산중고등학교의 서쪽에 있는 넓고 깊은 골짜기이다. 옛날 여기에 도화사가 있었다 한다.
개변고개
- 울산중고등학교의 동남을 개변고개라 한다. 학성지방은 신라 때 계변성이라 한 울산의 고칭이었는데 그 고을 이름이 여기에 남아 있다.
단장골
- 복산과 약사의 경계를 이룬 골짜기로서 지금은 삼성SDI 사택지로 되었다.
소전걸
- 지금의 제일아파트(옛 울산제일중학교) 서쪽을 소전걸이라 하였다. 여기에는 우시장이 있었기 때문이었으며 성남시장으로 옮겨가서 작은못으로 작은못에서 구교못으로 구교못에서 내황으로 옮겼다.
문둥고개
- 지금의 울산성당 동남쪽을 문둥고개라 하였다. 소가 죽거나 하면 이곳에 묻기도 한 외딴 곳이었다.
양사장내묘등
- 소전걸의 서쪽에 있었던 묘등이다. 학산동의 서당 사장을 하였던 양씨들의 무덤이 여기에 있어서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그곳을 양사장내묘등이라 하였다.
병막
- 울산성당 자리는 옛날 전염병환자를 격리수용하던 격리병사가 있었던 곳이었다. 뒤에는 병막을 삼성SDI사택 서남쪽으로 옮겼다가 폐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