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동(東洞)은 본시 동동리(東洞里)라 하였으며 고종 31년(1894)에는 성내에 있었던 동동과 성 밖의 산주(山酒), 어부(漁府)의 3개동으로 잘라져 있었다. 1914년의 행정구역개편 때에 동동, 산주, 어북의 전부와 남동, 북동의 각 일부를 합하여 이를 동리라 하였다.
노동(路東)과 노서(路西)
성안에 들어있는 동동은 노동과 노서로 갈라져 있다.
산전(山田)
산전은 본시 산주동이라 불러 왔는데 이를 1914년 이후에 이르러 산전으로 고쳤다. 산주(山酒)라 하는 것을 잘 고찰하여 보면 주(酒)는 수리의 취음(取音)으로 보고자 한다. 산악의 우리 국어가 수리인데 이 수리를 악(嶽), 소(蘇), 근(近), 수레[車(거)], 술(述), 술(戌), 취(鷲)로도 음차 내지 훈차하여 왔다. 이러한 것을 볼 때 수리의 준말은 술이 되므로 술의 차음이 술[酒(주)]이 되고 술은 주(酒)니 산주(山酒)가 된 것이다.
산전샘
산전샘은 약 350년전에 자연수가 솟아오른 샘이었는데 온 병영사람들이 이를 식수로 사용하여 왔다. 그 후 병영이 있었을 때 지금처럼 돌로 쌓았다고 전해오나 그 연대는 확실치 않다. 이 샘은 물이 맑고 맛도 좋으며 끊임없이 솟아 나왔다. 그러므로 병영성내 사람들도 식수만은 이 샘물에 의존하고 있었다. 석양지는 산전에는 머리 땋은 처녀들이 물동이를 이고 줄을 지어 성내를 오고갔다. 해방뒤에는 이 샘의 수질을 안 미군부대에서 이 물을 사용하였으며 멀리 부산과 대구까지도 실어갔다. 그러나 1967년에 울산시에서 시비(市費) 836만원을 들여 산전샘 부근의 지하수를 뽑아 병영에 상수도를 시설한 뒤로는 그만 수원이 고갈되어 지금은 폐천되고 말았다. 울산읍지는 이 산전샘을 말하여 "한시간에 솟는 물은 80섬이요 하루 퍼낼수 있는 양은 1820섬이니 능히 천호가 사용한들 줄지 않는다"고 하였다.
산전 미나리
산전샘에서 끊임없이 맑은 물이 솟아 흐르므로 샘의 아래에는 미나리를 심어 봄철의 구미를 돋구어 왔으므로 울산지방에서는 평산미나리와 함께 그 이름이 높았다. 지금은 논을 다 메워 택지로 만들고 말았다.
어북골[漁北谷(어북곡)
산전의 바로 북쪽에 있는 마을이다. 고종 31년(1894)에는 어부동이라 하였다가 1911년에 어북동이라 하였는데 그 유래는 알수 없다. 직업훈련원 앞에 있었던 산을 들어내었는데 절박한 산을 엎고 있는 마을이라 하여 어분골이라 하지나 않았는지 모르겠다. 지금도 발음은 어분골이라 하며 매암동에도 어분개가 있다.
근심다리
병영(兵營)에서 죄인을 처형하던 장대는 동동의 617번지 앞이었다 하며 장대로 가는데는 작은 돌다리 하나가 있었다. 죄인들은 다 이 돌다리를 지나면 바로 형장의 이슬이 되는 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다리에 와서는 주춤걸음을 멈추곤 하였다고 전해온다. 이러한 일로 말미암아 이 다리를 사람들은 근심다리라 부르게 되었다.
빗살무늬 토기 유적
병영(兵營)에서는 신석기시대의 유물인 빗살무늬토기를 비롯하여 마제석부(磨製石斧), 지석(砥石), 석촉(石 ), 석포도(石敍刀) 등이 출토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1919년에 일인 학자들이 김해(金海)의 회현리패총(會峴理貝塚)을 발굴하여 보고서를 낼 때 부재된 표에 기록하였으므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이런 것을 미루어 본다면 신석기시대에 이미 이곳에는 사람들이 살았던 취락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동문터
동문이 있었던 곳은 동동 253번지이다.
해양교(海陽橋)
해양군 윤희평이 동천에 놓았던 다리이다. 그가 좌병사로 있을 때 판자로, 놓은 다리였다. 지금의 병영일대를 이조초기의 기록에는 거마곡이라 하였다. 거마곡(巨?谷)이라 하는 말을 큰골[大谷]에 대한 음차로 보고자 한다. 거(巨)는 뜻대로 크로 보며 마(?)는 그 음의 반절을 취한다면 이는 큼이 되어 큰 골자기의 뜻이 된다.
서동
병영성내를 내상면(內廂面)이라 하였으며 이 내상면을 정조 때 기록을 본다면 남동리, 서동리, 북동리, 동동리의 네 개 마을로 갈라 놓고 있었다. 1914년의 행정구역개편 때에 이 서동리(西洞里)에 남동(南洞), 북동(北洞), 장현동의 각 일부씩을 합하여 서리(西里)라 하였다. 지금 행정상으로는 병영동(兵營洞)을 이룩하고 있다.
서동
고종 31년(1894)의 읍지를 보면 병영성안을 동헌(東軒)을 중심으로 하여 그 방위에 따라 동, 서, 남, 북동으로 갈라져 있었다.
병영
지금의 병영성내를 이조초에는 거마곡이라 하였다. 태종 17년(1417)에 경주의 토을마리에 있었던 경상좌병영을 이곳으로 옮겨왔다가 세종 8년에 좌병영을 한동안 폐지하고 울산군의 첨절제사가 이를 대리하여 오다가 세종 19년에 다시 이곳에 두게 되었다. 한편 병영성이 완성되자 한동안 울산군청을 이 병영성안으로 이전한 일이 있었는데 이는 세종 8년(1426)의 일이었다. 그 뒤 세종 19년경에 다시 군청을 북정동으로 이전하여 갔다. 구한말에 와서 군대를 개편하여 진위대라 하였을 때도 육군보병 제3연대 3대대가 역시 이곳에 머물다가 진위대가 해산할 때 오랜 군사기지로서의 역할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러한 5백년동안의 군사기지는 이곳 울산의 문화, 경제, 성격등에도 큰 영향을 끼쳐왔다. 병마절도사영이 있었던 곳을 다 내상이라 하였으며 병마절도사영의 준말이 병영인데 동헌(東軒)은 지금 병영초등학교 자리이다.
병영성(兵營城)
병영성은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영성이다. 좌병영을 태종 17년(1417)에 이곳으로 옮겨온 뒤에 그해에 성을 쌓았다. 이 병영성을 문종 원년(1451)의 기록에 따라 살펴보면 둘레가 3732자, 높이 8자, 여장고 3자, 적대 21, 가운데 미축 3문, 4옹성이 있으며 여장 908, 성내 우물 11, 샘3, 해자는 파기도 하고 혹은 미완성된 곳도 있었다고 하였다. 또 동국여지승람은 둘레 3723자 높이 12자 우물 7, 도랑2, 군창, 동융루, 조련고, 선위각이 있다 하였다. 이러한 병영성도 정유재란 때 왜적들이 이 성을 헐어 도산성을 쌓았으며 기록에는 볼수 없으나 뒤에 다시 복원한 것으로 보여진다. 철종 기미에 이르러 병사 이원희가 남문밖에 성을 확장하여 성 밖에 있었던 장시와 못, 대 등이 성안에 들게 되었다. 지금도 많은 성지가 남아 있다.
가지마골
옛날 이곳은 도축을 하던 곳이었다 한다. 잔인하게 동물을 죽이는 꼴을 못보도록 가지마라고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당부하던 곳이었으므로 가지마골이라 부르게 된 것이라 한다.
사기장골
성넘어 장현동과 접경하는 곳에 있는 골짜기이며 마을이 있다. 옛날 사기를 반조하던 곳이었으므로 사기장골이라 하며 이곳 남쪽에는 고령토가 난다. 그런데 이 사기장골을 재여답리로 보고자 한다.
공안산(公安山)
장현동 앞에 있는 산인데 여근(女根)같이 생겼다 하여 그렇게 부른다고 하며 이 산을 건드리면 마을 처녀가 바람이 난다고 한다.
장현동
장현동은 고종 31년(1894)과 1911년, 1914년의 기록들이 모두 장현동이라 하였으며 뒤에 이르서도 장현이라는 이름도 나타나 지금의 이름으로 된 것은 1914년의 행정구역의 정리 때에 시려의 일부를 합하여 붙여진 것이다. 또 장현을 장티라 한다. 티는 치와 마찬가지로 고원에 있는 마을에 붙여지고 있다. 장티의 유래는 장씨들이 이 마을에 먼저 살았다 하여 장티라 부르게 된 것이라 한다. 그런데 장현이라 하기 전에 이곳의 지명이 장현이었던 것을 본다면 장티 또는 진티에서 유래된 것으로 짐작한다. 지금은 행정상으로 병영동에 합하였다.
황방산
장티의 서쪽에 있는 산이다. 이 황방산은 병영의 주산인데 주산이라 함은 북쪽에 있는 산으로 풍수지리에 묘자리나 집터나 도읍터의 운수와 기운이 매였다는 산을 말한다.
장현동즐문토기유적
이 장현동의 유적은 1959년의 해원황의돈선생 고희기념사학론총에서 김원룡 교수가 낸 「울산군 하상면 장현리 출토의 석기·토기」라는 보고서에서 밝혀진 것인데 즐문토기를 비롯하여 석검·석도·석부·석촉 등이 출토되었다. 이 유물들은 표고 142m의 황방산에서 발견된 것이며, 이 산 일대에는 석기시대의 유물이외에 삼국시대의 신라토기편·통일신라시대 토기 및 그 이후의 유물까지 발견되었다. 이 논문의 보고자인 김교수는 황방산에서 채집한 석기류와 토기류를 고찰한 결과 이 유적산표지를 금석병용기에 속하는 유적이라고 지적하였다. 또 여기에서 나온 삼각형석도는 대체로 청동기시대의 것으로 보는 모양이다.
장티고인돌
울산지방에는 고인돌이 그리 흔하지 않다. 장티 이외에 언양면 상북면, 서생면, 강동면 정도가 분포되어 남아있는 것으로 추정될 뿐이다. 장현동에도 황방산 아래에 암바위와 숫바위가 있다. 이곳 사람들은 이 두 바위가 밤중에는 서로 살짝 만나서 사랑을 속삭이며 그렇게 때문에 황방산에는 새끼돌이 많다고들 한다. 또 이 고인돌로 보이는 두 돌과 황방산의 정상에 있는 망바위의 셋을 가지고 옛날 어느 장수가 살구받기 놀이를 하였다고 한다. 살구받기는 공기받기의 울산지방 방언이다.
상천골
뒷각단의 서북쪽에 있는 마을을 쌍천골이라 하는데 이는 두내가 합수 하는 곳이므로 그렇게 부른다.
앞각단·뒷각단
장티의 남쪽마을을 앞각단, 북쪽마을을 뒷각단이라 한다.
황방골
앞각단 서편의 황방산 기슭을 황방골이라 한다.
빠구매기골
사기장골과의 접경을 빠구매기골이라 하는데 그 유래는 알 수 없다.
평밭
시례 8반으로 넘어가는 시례천변의 들을 평밭이라 한다. 이는 평평한 들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실계넘에
시례로 넘어가는 곳에 있는 들을 말하는 것인데 시례는 실이 되고 계는 계(溪)이니 즉, 실계는 지금의 시례천을 말하는 것이다.
부엉더미
황방산의 북쪽에 있는 시례천을 바라보는 벼랑진 난간이다. 여기에 부엉이가 집을 짓고 새끼를 기르기 때문에 부엉더미라 한다. 장티에서는 부엉이가 새벽에 울면 풍년이 지고 길하며 저녁에 울면 흉년이 들고 불길하다고들 전해온다.
망바위
황방산의 가장 높은 곳에서 울산만 쪽으로 보고있는 바위이다. 옛날 남편을 배 태워 외국으로 보내고 그 아내가 아이들을 데리고 여기에서 바다를 보며 남편을 그리워하던 곳이라 한다. 그러나 설화를 떠나서 지명 본연의 정체를 살펴본다면 산신바위의 뜻을 가졌다. 망은 산신을 뜻하는 것이다. 망자가 붙어 산신의 뜻을 가진 용례는 몇군데서 볼 수 있다. 황방산의 산명이 광명하다는 뜻을 가졌고 또 병영의 주산인 것을 본다면 산신제를 지냈던 산임을 짐작할 수 있고 망바위를 이곳에서는 장수 살구돌(공기받기 돌)의 하나라고 한다.
화지대배기
현감벼슬을 지냈던 황응청에게는 중신이라 하는 손자가 있었다. 그의 자는 자정이요, 호는 노항이며, 평해인이다. 일찍이 여헌 장현광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다. 광해군 1년(1609)에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며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아들 윤과 같이 의병장 정호인의 진중으로 달려가서 힘을 합쳤다. 그는 만년에 영천에서 장현동으로 옮겨 살게 되었다. 그 뒤에 아들이 벼슬길에 오르게 되자 화지대를 세워 온 마을이 잔치를 하였다. 이 화지대를 세운 곳을 화지대배기라 하며 옛날에는 산이었으나 지금은 밭이 되었다. 이 화지대배기는 바깥시례로 가는 곳에 있다.
망바우골
황방산 망바우에소 동쪽으로 늘어진 골짜기를 망바우골이라 한다.
안시래
행정구역상으로는 장티에 속하나 농소면의 안시례와 가까이 있는 마을이므로 역시 안시례라 한다. 이러한 예는 약사와 접경한 성안동의 한 반을 역시 약사라 부른다. 시례라 함은 시리와 같다하여 시례라 하는 것이며 시례란 글은 음차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시리는 시루의 방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