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혁 및 지명유래

다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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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동(茶雲洞)은 정조 때는 다전(茶田)이라 하였으나 고종 31년(1894)에 다전과 운곡(雲谷)의 양동으로 갈라져 있었는데 1914년의 행정구역개편 때 다전과 운곡의 두 동과 지금은 서사리(西沙里)에 속해 있었던 신안동(新安洞)의 일부를 합하여 이를 다운리(茶雲里)라 하였다.

다전

  • 다전이라 하는 마을 이름은 차나무를 심었던 밭이었다는데서 유래된 것이다. 차는 신라의 선덕여왕때부터 알려져 마시는 풍습이 생겼다가 흥덕왕 3년(828) 12월에 사신으로 갔던 김대렴이 당나라에서 돌아오면서 종자를 가지고 와서 왕이 지리산(地理山)에 심게 한 것이 우리나라 차의 시초이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울산군은 토공품(土貢品)으로 작설차(雀舌茶)를 바쳤다 하였으며 동국여지승람도 토산의 하나로 우불산(于佛山)의 차를 들었다. 이러한 문헌상의 기록으로 보아 다전의 차 생산도 그 기원은 퍽 오래 되었을 것이다. 지금도 기숙등에는 차나무가 자생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구루미

  • 구루미를 고종 31년(1894)에 운곡(雲谷)이라 하였으며 이때는 난곡(蘭谷)까지를 관할하였다가 1911년에는 운곡(雲谷)이라 하여 난곡(蘭谷)은 물론 말정(末亭)까지도 관할하에 두었다.
    • 마을 동편에 있는 어사암이 마을을 보고 구부린듯하다 하여 굴암(屈岩)이라고 하던 것이 구라미, 구루미로 변하여 한자로 쓴 것이 운곡(雲谷)이 되었다 한다.
    • 삼호다리 밑 일대의 태화강을 해연(蟹淵)이라 하였다. 해는 게[蟹]니 게가 개[犬]로 되고 개는 구(狗)와 같은 것이 된다. 그러므로 구루미는 옛날에 구리라 하던 것이 접미사 미가 붙어서 구리미가 되고 구리미는 구루미로 변하여 한자로 운곡이라 한 것이라 한다.
    • 구루미의 서북편에 있는 산의 생긴 모양이 마치 개머리 같으므로 구리동(狗里洞)이라 하던 것이 구르미(雲)으로 변한 것이라 한다.

붓둑모티

  • 구루미에 속한 마을인데 천과교의 다리목에 있다. 붓둑 모퉁이에 있다하여 그렇게 부른다.

사군탄

  • 베리끝 남쪽의 태화강을 사군탄이라 한다. 이곳은 배리끝의 슬픈 이야기와 관계가 되어 생긴 이름이다. 큰 물이 나서 강물이 남창 남창 흘렀는데 아내와 누이를 데리고 같이 이곳을 지나던 한 젊은이가 있었다. 그만 아내와 누이가 같이 실족하여 홍수가 흐르는 강물에 빠져 떠내려 갔으나 아내는 구했지마는 누이는 영영 물귀신이 되고 말았다. 그 뒤에 누가 지었는지 모르는 노래가 유행하게 되었다. 남창남창 베리 끝에 무정하다 우로라바. 나도 죽어서 후생 가면 낭군님부터 정할나네. 누이가 물에 빠져 죽으면서 오빠를 원망하여 낭군님부터 정할나네 하였으므로 사군(使君)이라 하였으며 탄(灘)은 물 가운데 돌이 많은 곳의 흐름을 말하는 여울이다.

낭관소

  • 사군탄 아래를 낭관소라 한다. 낭떠러지의 험한 언덕을 낭간이라 하며 또한 베랑이나 벼랑이라고도 한다. 베리끝이라 하는 것도 벼랑끝이라는 사투리이다. 말의 본의는 낭떠러지에 있으나 이것을 사군탄의 애화와 결부시켜 낭관소라 하였으며 여기를 또 나가소라고도 하여 나가소의 전설도 생겨났다.

해연

  • 낭관소 아래를 해연이라 한다. 기숙등[蟹宿嶝(해숙등)] 아래에 있기 때문에 해연이라 부르게 된 것이라고도 한다. 사군탄, 낭관호, 해연을 총칭하여 삼탄 또는 삼호라 한다.

도계골

  • 다운목장이 있는 골짜기를 도계골이라 한다. 한편, 이곳을 도적이 숨어 살던 곳이라 하여 도덕골이라고도 전해온다. 또한, 이곳을 유곡과 태화에서 독적골이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독점골이 와전된 것으로 봄이 좋을 듯 하다.

어사암

  • 구루미 마을의 동남쪽 산 끝에 있는 바위이다. 여기에서 어사(御使)가 쉬면서 울산원과 만났다는 전설이 있다.

원고개

  • 어사암(御使巖)의 북쪽에 있다. 원이 질러갔다 하여 원고개라 하며 어사암(御使巖)의 전설과 관계되는 지명이다.

동마실

  • 다전(茶田)의 본마을을 갈라서 남쪽과 북쪽이라 부르기도 하고 또 서천(西川)을 넘어 산록에 따로 있는 마을을 동마실이라 부른다.

새각단

  • 다전의 북쪽에 떨어져 있는 마을인데 새로된 마을이라 하여 새각단 또는 신리라고 부르며 띠밭등이라고도 한다.

말미등

  • 새각단의 북쪽에 있는 범서면 서사리와 접경을 이루고 있다. 말미등이라 하는 것은 말뫼등[馬山嶝(마산등)]이 변한 것인데 마산이라고도 표기한다. 말미 또는 말뫼라는 말은 높은 웃머리되는 산인 머리뫼란 뜻을 가진 것인데 이것을 한자로는 두리산(頭里山), 뇌산(磊山), 마산(馬山) 등으로 썼다. 머리뫼란 것은 그 산아래 사는 사람들이 매일 조석으로 쳐다보면서 저 산은 햇빛의 조림(照臨)을 제일 먼저 받을 만큼 가장 높은 우두머리격인 산이라 하여 마리뫼, 머리뫼라고 불러옴으로부터 발생한 말이었으며 이 머리뫼라는 산명은 다분히 그 마을의 머리인 진산(鎭山) 즉 주룡산(主龍山)의 이름으로 부르는 것이라 하였다. 지리산(地理山)의 두류산(頭流山)이란 일명도 이 머리뫼를 뜻하는 것이다.

갓골

  • 다전의 북쪽에 있는 골짜기이며 갓골[森谷(삼곡)]의 뜻을 가졌다. 지금은 한 집이 있다.

한대밭골

  • 갓골의 안쪽에 있는 골짜기인데 넓은 골짜기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산송골

  • 범서산성의 동쪽에 있는데 산성 아래에 있으므로 그렇게 부른다.

춘산골

  • 동쪽마실의 동편에 있는 골짜기이며 약물이 난다.

서일골

  • 띠밭등의 동북쪽에 있으며 흔히 실골이라 하는 깊은 골짜기이다.

봇동산

  • 다전의 동쪽에 있는 산을 말하는 것인데 보의 동쪽에 있는 산이라 하여 그렇게 부른다.

기숙등

  • 다전 마을의 서남쪽에 있는 산인데 태화강에 임한 곳을 베리끝이라 한다. 게가 자는 형국을 하였다하여 기숙등이라 부르며 기는 게의 방언이다. 이 기숙등에는 차나무가 자생하고 있으며 다전고군분이 이산에 있다.

장꿩만디

  • 다전 마을의 서북쪽에 있는 봉우리인데 수꿩이 나는 모양을 하고 잇다. 만디는 말랑을 말하는 것이다.

다전고분군

  • 기숙등과 마을 일대에 걸쳐 있는 고분군이다. 여기에서는 김해토기(金海土器)라 하던 와질토기와 도질의 신라토기를 비롯하여 철모, 철부(鐵斧), 마구등을 비롯하여 석기류도 나왔다. 묘는 동침을 한 석곽묘(石槨墓)가 대부분이며 바닥에는 냇자갈을 깔았으며 사방벽은 돌로 짜올리고 위에는 판석으로 덮고 있다. 마을을 비롯한 넓은 지역은 그때의 주거지였으리라 추정되어 곳에 따라서는 조개껍질이 많이 나오기도 한다. 이곳은 굴아국(屈阿國)의 주거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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