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정동인 중앙동
중앙동은 행정동이며, 법정동은 성남동, 교동, 옥교동, 학산동, 북정동이다. 행정동은 행정상 편의를 위해 설정한 행정구역 단위로 행정동에 동주민센터가 설치된다. 법정동은 법률로 정한 행정구역으로 일반적으로 전통적으로 오래 쓰이던 지명을 그대로 따른다. 주로 주소나 명칭으로 사용된다. 2009년 1월 1일 행정안전부의 소규모 동 통·폐합에 따라 먼저 행정동 성남동(법정동 성남동, 교동)과 행정동 옥교동(법정동 옥교동, 학산동)이 통합되어 중앙동이 되었으며, 이후 2014년 9월 1일 울산광역시 중구청의 행정구역 변경에 따라 북부순환도로 아래 북정동 4개통이 편입되었다. 19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울산의 중심가로써 시내(市內)라고 불리었지만 지금은 시대적 변화에 따라 원도심으로 불리운다.
성남동
성남동(城南洞)은 영조 41년(1765년)에 상부내면 주부리(主部里)와 남문내리(南門內里)로 있었다. 정조때(1777년∼1800년)는 외중부리(外中部里), 내중부리(內中部里), 남문내리, 고종 31년(1894년)에는 상부면 외부동, 내부동, 성남동으로 바뀌었다. 1914년 4월 1일 위 3개동에 강정과 우암의 각 일부를 합하여 부내면 성남동이라 하였다.
성남이라함은 읍성의 남쪽마을이란 뜻인데 울산읍성은 임진왜란때 왜병들이 이를 헐어 울산왜성을 쌓은 뒤로는 복원을 하지 못하였다. 1917년 10월 1일 부내면이 울산면으로 개칭되어 울산면 성남동, 1931년 11월 1일 울산면의 읍 승격으로 울산읍 성남동이 되었다.
1962년 6월 1일 울산시 승격으로 울산시 성남동이 되었고, 1963년 11월 1일 중앙출장소 관할이 되었다.
교동(校洞)은 숙종 34년(1708년) 상부내면 서문내리(西門內里)·서문외리(西門外里)·신교리 (新校里)·북문외리로 나뉘어 있었다. 정조 때(1777년∼1800년) 상서문내리·서문외리·하서문내리·북문외리로, 순조10년(1810년) 상서문내리·하서문내리·신교리가 되었다. 고종 31년(1894년)에는 상부면 하서동과 교동, 1911년에는 상서동·하서동·교동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1914년 4월 1일 부내면 교동이라 하였는데, 교동이라 함은 향교가 있는 마을이란 것이다.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향교를 이곳에 옮겨 지으면서 이쪽은 신교리 하부면 쪽은 구교동리라 불렀다. 상서동의 일부는 북정동에 편입하였다. 1917년 10월 1일 부내면이 울산면으로 개칭되어 울산면 교동, 1931년 11월 1일 울산면의 읍 승격으로 울산읍 교동이 되었다. 1962년 6월 1일 울산시 승격으로 울산시 교동이 되었고, 1963년 11월 1일 중앙출장소 관할이 되었다.
1972년 10월 1일 울산시의 31개 행정동 개편에 따라 성남동과 교동을 합쳐 성남동을 설치하였고, 1976년 4월 20일 울산시 중앙출장소를 폐지하였다. 1985년 7월 15일 울산시의 구제(區制) 실시로 중구 성남동이 되었다. 1997년 7월 15일 울산광역시 중구 성남동이 되었다. 성남동과 교동을 관할하고 있다. 2009년 1월 1일 옥교동과 합쳐 중앙동으로 통합되었다.
내부동(內部洞)
- 읍성 안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내부동이라 하였을 것이다.
외부동(外部洞)
- 읍성의 바깥에 있는 마을이라 하는 뜻이었는데 이는 웅수골을 위시한 서쪽에 있었던 마을 이라 생각된다.
남문터(南門- )
- 읍성의 남문을 강해루라 하였는데 이 남문의 위치는 태화루 앞 백보에 있다 하였으므로 대체로 지금의 상업은행 남쪽 근방으로 추정할 수 있다.
남문안
옹수골
- 성에는 성문이 있고 이 성문을 보강하는 시설로 옹성이 따로 있었다. 옹수골은 울산읍성의 서문에 옹성이 있었으므로 옹성골이 와전하여 옹수골이라 하였다. 문수장여관의 서북 일대이며 교동에 까지 걸친 지명이다. 외부동에 속하였을 것이다.
연못
- 연못은 퍽 오래된 못이었다. 동국여지승람에도 등재되어 있는 못이었다. 성남시장은 이 못을 메워 이룩된 시장이다.
구역터(舊鐵道驛-)
- 동해남부선이 개설되기 전 까지는 울산 경주간을 운행하던 철도가 있었다. 이때의 울산역은 소방서 남쪽 일대에 있었다. 동해남부선은 1934에 개통되었다.
홍교(虹橋)
- 태화진의 어귀에 놓은 다리를 무지개 같은 다리였다하여 그 이름을 홍교라 하였다. 이 돌다리는 참봉 이 만령이 사비를 드려 놓았으며 태화교의 다리목에 선적을 기리는 비가 있다.
섬
- 태화강의 울산교를 중심하여 강에 동서로 길게 뻗친 섬이 있었다. 섬의 북쪽을 앞강, 남쪽을 뒷강이라 하여 구분하여 부르기도 하였으며 성남동쪽에 있는 시장에서는 해마다 추석 때 씨름판을 벌려 울산의 가장 큰 축제를 하여 오다가 정지말 운동장이 되면서 그리로 옮겨 갔다. 섬은 동쪽으로 옥교동까지 걸쳐 있었으나 수년전에 섬을 들어내고 지금처럼 정리하였다.
상서(上西)
- 상서의 위치는 분별하기 어렵다. 다만 일부를 북정동에 합한 것을 보면 북정쪽으로 있었던 마을이었을 것이다.
하서(下西)
- 하서는 성 아랫쪽 서편에 있다는 마을명 이었을 것이다. 이 하서는 옹수골이라고도 하였다. 옹수골이라 하는 것은 옹성골에서 나온 말이다.
양사골(養士-)
- 양사초등학교 자리에 고종 19년에 부사 박제만이 중건하였던 양사제라 하던 교육기관이 있었다. 이 양사제는 삼일당이 있었던 옛자리에 세운 것인데 이로 말미암아 그 동편일대를 양사골이라 하였다. 양사초등학교의 이름도 여기에서 딴 것으로 보아진다.
북문안
- 고종 31년에 북문이라 하던 마을인데 측후소의 서편 일대를 지칭하여 북정동에 걸쳐 있다. 울산읍성의 북문이 여기에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는 것이며 북문의 안쪽 마을이라는 뜻을 가졌다.
동녘골
- 향교의 동쪽 일대를 동여골이라 하는데 이는 동쪽이란 방위를 나타내는 동녘골이다. 옛날에는 여기가 가장하는 채봉터였다한다.
불선바우(불썬바우)
- 향교에서 북쪽으로 성안의 경계에 이르기까지의 골짜기를 불선바우라 이른다. 골짜기의 북쪽산에는 높은 암벽이 있어 이 바위에 향촉을 밝혀두고 공을 들이기 때문에 이 바위를 불선바우라 한다. 불이라 함은 향불 또는 촛불을 뜻하며 선다함은 불을 켜다 하는 말이나 공을 들인다는 뜻이다. 지금도 바위를 신앙하는 토속신앙이 많아 깊고 맑은 산천을 가며는 불선 흔적들을 많이 남겨놓고 있다. 불선바우라는 바위이름이 골짜기 이름으로도 되었다. 이 불선바우 골짜기는 우정동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울산향교(蔚山鄕校)
- 울산향교는 본시 반구동의 구교동에 있었으나 임진왜란 때 불 타버린 것을 효종 3년에 이곳에 새로이 지었다.
옥교동
옥교동(玉橋洞)은 영조 41년(1765년) 상부내면 노서리·노북리·노동리로 되어 있었다. 1914년 4월 1일 노하동의 일부를 합하여 울산군 부내면 옥교동이라 하였다. 옥교라 함은 옥골을 그렇게 고쳐 부른 것이라 생각된다. 1917년 10월 1일 부내면이 울산면으로 개칭되어 울산면 옥교동, 1931년 11월 1일 울산면의 읍 승격으로 울산읍 옥교동이 되었다. 1962년 6월 1일 울산시 승격으로 울산시 옥교동이 되었으며, 1963년 11월 1일 중앙출장소 관할이 되었다.
학산동(鶴山洞)은 숙종 34년(1708년) 상부내면 동문외노하리였다. 울산초등학교에서 옛 제일중학교 앞으로 통하는 길 아래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노하동이라 한 것이다. 1914년 4월 1일 부내면 학산동이라 하였는데, 동산말랑이에 학이 많이 와서 앉았으므로 이로 말미암아 학산동이라 한 것이라 한다. 1917년 10월 1일 부내면이 울산면으로 개칭되어 울산면 학산동, 1931년 11월 1일 울산면의 읍 승격으로 울산읍 학산동이 되었다. 1962년 6월 1일 울산시 승격으로 울산시 학산동이 되었으며, 1963년 11월 1일 중앙출장소 관할이 되었다.
1972년 10월 1일 울산시의 31개 행정동 개편에 따라 옥교동과 학산동을 합쳐 옥교동을 설치하였고, 1976년 4월 2 0일 울산시 중앙출장소를 폐지하였다. 1985년 7월 15일 울산시의 구제(區制) 실시로 중구 옥교동이 되었다가, 1997년 7월 15일 울산광역시 중구 옥교동이 되었다. 옥교동과 학산동을 관할하고 있다. 2009년 1월 1일 성남동과 합쳐 중앙동으로 통합되었다.
옥골새미
- 고려병원 서북쪽에 우물이 있는데 이것을 옥골새미라 한다. 옛 우물로는 이것 이외에 학산동의 노하새미·우정동의 강정새미가 있어 다 물이 풍부하여 이름이 높았다.
새치이
- 철로의 동남부 일대를 새치이라 부른다. 새는 新(신)을 뜻하며 치는 육지가 바다나 물가로 돌출한 반도형을 이르는 말이다. 울산지방에서 치가 붙은 지명은 여러 곳에 있다. 「이」는 접미사이니 새치이는 새로이 형성된 충적지에서 생긴 이름일 것으로 본다.
장대
- 새치이의 서쪽을 장대라 하여 이곳은 울산도호부의 형장이었다고 전해온다.
성둑(성뚝)
- 옛 기독병원에서 동북으로 통하는 금성여관 앞길을 성둑이라 하였다. 이곳은 울산읍성의 성터였으며 대밭이 된 곳도 있고 동남쪽은 미나리를 심었던 논이었다.
도총소(都總所)
- 옛 상부면소이며 권농관이 머물던 곳이다. 뒤에는 울산면사무소가 되었다가 읍으로 승격된 뒤에도 여기에서 집무하다가 학산동으로 옮겨 왔다. 현 태화서원이며 도총소라 하는 것은 집회소를 말하는 도청으로 보아진다.
장터걸(장터껄)
- 울산국민학교에서 울산교에 이르는 도로변 일대를 장터걸이라 하였다. 주된 상점가이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다. 걸은 거리의 준말이다.
동산말랑이
- 옛 전매서 북편의 구릉진 곳을 동산말랑이라 하였다. 여기는 옛날 솔이 우거진 곳이었는데 학떼들이 날라와서 앉았다 한다. 말랑이는 마루이니 산등성이 진곳을 말한다.
고래
- 옛 시민관 일대를 고래하 하였다. 고래라고 하는 것은 바닥이 깊고 물이 잘 빠지지 않는 습지를 말한다. 이러한 곳의 논밭을 고래라 하였다.
대발밑(대밭밑)
- 시민관 서북쪽을 대발밑이라 하였다. 태화강 제방이 없었을 때는 이곳까지 홍수가 올라왔다 한다.
읍사무소
- 현 행정복지센터 자리는 읍사무소였다. 옛날 울산시청, 중구청, 옥교동사무소 자리이기도하다. 1934년에 이층이 화재로 타버리고 개축하였고, 1999년대에 중앙동사무소로 재개축, 현재는 중앙동 행정복지센터로 쓰이고 있다.
노하새미(路下-)
- 수량이 풍부하여 가뭄에도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다. 복산동 사람들까지도 이 물을 먹었다.
타작마당
- 옛 교육청이 있던 마당을 타작마당이라 하였다. 이 마당에서 곡물의 타작을 하였다.
새질가
- 복산초등학교 앞을 동서로 관통하는 도로는 일찍 개설이 되어 몇번이나 확장을 보게 되었고 중앙동주민센터 앞을 동서로 통하는 길은 뒤에 되었다. 그러므로 이 길을 신작로라 하였 으며 이 신작로가에 있는 곳을 새질가 또는 새질강이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