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소

어느 옛날의 일이었다. 다전 마을의 낙안산의 끝에는 나씨의 일족이 큰 마을을 이루어 살고 있었다. 또 태화강 물도 지금과는 그 강심(江心)을 달리하여 범서면 백천에서 굴화 앞을 지나 삼호 마을의 남쪽으로 흘렀다 한다. 그런데 나씨들이 마을을 이루어 살던 곳은 땅이 넓고 또한 기름진 땅이어서 대대로 마을은 남달리 풍요한 마을이라 할 수 있었다.

이렇게 잘사는 마을일 뿐만 아니라 신라(新羅) 서울 경주(慶州)에서 동래(東萊)로 가는 길목이 되어 있기도 하여 과객들의 드나듦도 빈번하였다. 하루는 이미 해가 서산에 기울었는데 다리를 끌며 무거운 발걸음을 재촉하는 노인 한분이 이 마을에 들어섰다. 삿갓을 깊숙이 쓰고 지팡이를 짚은 이 노인은 옷도 남루하여 한눈으로 보아서 걸인과 별 다를 바가 없었다.

이 노인은 마을에서 집이 가장 크고 부짓집 같은 한 집을 찾아 대문안으로 들어서며 주인을 찾는다. "이댁 주인 계시오?" 하고 불렀으나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조금 있다가 길손은 다시 목을 가다듬고 "주인 계시오?"하고는 말을 걸어왔다. 이윽고 한 종이 나오며 "누구를 찾습지요?"하고는 말을 걸어왔다. "다름이 아니라 길가는 나그네인데 주인을 좀 뵙고자 하네."하니 조금 기다리라 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오래도록 기다리고 있으니 이윽고 바깥 주인이 나왔다. "누구인데 해저물 무렵에 사람을 찾소?" "예. 이사람은 월성(月城)에서 동래(東萊)로 가는 길손이온데 그만 해가 저물었기에"하며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주인은 "해가 저물기에 어찌 하자는 거요?"하며 되묻는 말이 아주 언짢은 눈치였다. "갈길은 먼데 헛간에서라도 하룻밤을 머물러 갈까하오"하니 주인은 다시 "우리마을을 찾는 사람이 당신 한사람 뿐인줄 아오. 손님들 때문에 우리 마을은 이젠 진절머리가 나서 못살겠소. 제발 좀 손님 안오는데 살았으면 하는 것이 우리 나가들의 소원이오."하고는 그만 안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이렇게 거절을 당하자 노인은 하는 수 없이 다시 길을 나서 무거(無去)에 이르러 등불이 켜진 한 주막집을 찾아 밤을 쉬었다. 날이 밝자 이 노인은 다시 주막을 나서서 영축산[靈鷲山(영취산)]으로 올라가 북쪽을 이윽고 살피더니 한동안 별 말이 없었다. 노인의 눈아래는 어제밤에 거절을 당하던 나씨들의 마을이 한눈으로 보였다.

다 기와집으로 된 집들이 옹기종기 들어서서 부자 마을임을 직감할 수 있었는데 한참동안 이 마을을 바라보며 말이 없던 노인은 한참 뒤에야 무슨 주문(呪文)을 외우더니 손에 가졌던 지팡이로 구영동 앞에서 배리끝을 거쳐 마을쪽으로 크게 한선을 긋더니 어디로인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이 일이 있은 뒤 갑작스럽게 서쪽 하늘에서 검은 구름이 덮여 오더니 하루 종일 쉴사이 없이 큰 비가 쏟아졌다. 밤이 되어도 비는 멈추지 않더니 새벽에야 겨우 멈추었다.

그러나 이 일대에는 많은 비로 천재지변이 일어났다. 곳곳에 산이 무너지고 강의 물줄기도 놀라게 변해서 태화강도 배리끝으로부터 나씨들의 마을을 지나 지금과 같은 형태로 변하였고 나씨들이 살던 마을은 흔적이 없어지고 그 주위는 큰 못이 되고 말았다. 이 일이 있는 뒤에 나씨들의 영화는 끝이 났으며 어디론지 다 헤어지고 말았는데 사람들은 그 도사의 소행이라고 하였다. 뒷날 사람들이 못이 된 마을터를 나가소라 하여 그 이름이 지금까지 전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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