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장수(1887. 5. 20 ~ 1952. 1. 3)

1919년 병영지역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서울 유학생으로부터 서울의 만세운동 소식을 전해들은 그를 비롯한 병영 청년 회원들은 수차에 걸친 협의 끝에 4월 4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병영에서도 독립만세운동을 추진하기로 하고 태극기를 만드는 등 거사준비를 하였다. 이들은 거사를 성공시키기 위해 혈서로서 맹세하고, 4월 4일 오전 9시경 일신학교(현 병영초등학교)에 집결하여 학생들을 동원한 뒤 태극기, 독립선언서 등을 나누어 주고 11시 40분경 일제히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수백명의 시위대는 일경의 탄압으로 주동인물 몇몇이 피체되면서 일단 해산하였다.

일경의 검거망을 피한 김장수를 비롯한 청년회 간부들은 다음날 만세시위를 함께 재개하기로 결의하고, 4월 5일 다시 일신학교에 집결하여 1천여 군중들과 함께 주재소를 에워싸고 전날에 검거된 주동인물들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이에 일본군 수비대가 무차별 사격을 가해 시위군중은 해산하고 그는 일경에 피체 되었다. 이일로 1919년 4월 24일 부산지방법원 울산지청에서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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