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근(1897. 8. 20 ~ 1957. 6. 16 호 : 화암)

경남 울산(蔚山)사람이다. 1919년 4월 4일과 5일에 걸쳐 하상면 병영리(下廂面 兵營里) 일대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전국적으로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고 있음을 알고, 이현우(李鉉禹), 이종근(李鐘根), 이문조(李文祚), 박영하(朴永下), 양석룡(楊錫龍), 김장수(金長壽)등의 청년회 간부들 및 이종근과 박영하의 집에서 몇 차례 만나 회의를 거듭한 끝에, 4월 4일을 거사일로 결정하였다.

그는 4월 3일, 이현우, 박영하 등과 함께 이종근의 집에서 만나 비밀모임을 가진 후, 박영하와 권작지(權作之)의 집에서 태극기와 독립기를 제작하고, 카아본 복사지로 2백여매의 독립선언서도 만들었다. 4월 3일, 이현우, 박영하 등과 함께 이종근의 집에서 만나 비밀모임을 가진 후, 박영하와 권작지(權作之)의 집에서 태극기와 독립기를 제작하고, 카아본 복사지로 2백여매의 독립선언서도 만들었다.

4월 4일 오전 9시경, 그는 다른 청년회 회원들과 함께 태극기와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일신학교(日新學校, 현재 兵營國民學校) 교정으로 나아갔다.

그는 일신학교 학생들도 합세케 한 후 , 오전 11시 40분경, 양석룡이 축구공을 하늘 높이 차 올리는 것을 신호로 일제히 태극기를 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서리(西理), 동리(東里), 남외리(南外里), 산전리(山田里) 일대를 두 번에 걸쳐 시위행진하였다.

이 광경을 본 성내의 시민들이 합세하여 시위군중은 수백명으로 늘어났다. 이때 이곳 주재소의 응원요청을 받은 울산경찰서장 이하 8명의 경찰과 일본군 수비대 5명이 출동하여 무력을 행사하며 해산시키려 하였다.

격노한 시위군중은 이들과 육박전을 벌였으나, 양석룡, 이종욱, 이종룡(李鐘龍)등 14명이 현장에 체포되어 울산경찰서로 압송되는 바람에 더 이상 만세시위를 전개하지 못하고 일단 해산 하였다.

방문자 통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