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석운 (1900. 8. 18 ~ 1943. 5. 9)

경남 울산(蔚山) 사람이다. 그는 1919년 4월 4,5일 양일간 경남 울산군 하상면(下廂面) 병영리(兵營里)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병영리는 조선시대에 경상좌도병마절도사영이 있던 곳으로 이곳의 청년들은 애국적 상무정신(尙武精神)이 강하였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병영리는 비밀결사 병영청년회(兵營靑年會)가 결성되어 항일의식을 고취하였으며, 최현표는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병영리의 만세운동은 서울 유학생 한명조·이영호 등이 3·1운동의 소식을 전해오면서 구체화되었다. 이 때 병영청년회 간부 이현우·이문조·이종욱·박영하 등은 수차에 걸쳐 협의를 거치며 4월 4일로 거사일을 정하고 만세운동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4월 3일에는 독립선언서 2백여 매를 작성하였고, 태극기 5백여 개를 제작하였다. 아울러 이들은 종이와 면주에 '구대한국독립만세','독립만세'라고 대서특필한 깃발을 제작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기사를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일심동체의 혈맹(血盟)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결의아래 오른손 가운데 손가락을 깨물어 '결사보국(決死報國)의 네글자를 혈서로 서명하였다.

거사일인 4월 4일 오전 9시경 최현표는 청년회원들과 함께 병영국민학교 교정으로 집결하여 학생들을 동원한 뒤 오전 11시 10분경에 축구공을 높게 치올리는 것을 신호로 독립만세를 기행하였다. 수백 명의 시위대는 면내 각 동리를 진군하다가 일경의 탄압에 의해 주동 인물 몇몇이 피체되면서 일단 해산하였다.

이 때 일경의 검거망을 피한 청년회 간부들은 4월 4일 저녁에 모여 다음날에 만세 시위를 재개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4월 5일 오후 3시를 기해 권석운 등은 일신학교에 집결하여 만세시위를 시작하면서 1천여 명의 군중들과 함께 주재소를 에워싸고 전날에 검거한 주동인물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이 때 울산에서 출동한 일본군 수비대가 무차별 사격을 가함으로써 시위대 중 문성초 등 4명이 현장에서 순국하였고 다수가 총상을 입었다. 이로써 만세시위는 해산되었고 최현표는 일경에 피체되었다.

그는 이 일로 1919년 4월 23일 부산지방법원 울산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6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주 : 신분장지문원지 · 한국독립운동사(문일민) 17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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