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4월 4일 병영의 청년회원들을 중심으로 전개된 독립만세시위가 중도에서 좌절된 것을 분하게 여기고 이문조, 이종근 등과 함께 김세진의 집에 피신, 밀회하여 이튿날의 재기를 계획하고, 문성초, 윤학이, 최현구 등 동지들에게 연락하여 거사를 준비케 하였다. 4월 5일 이른 아침 문성초, 윤학이의 연락으로 다시 일신학교 부근에 모여 오후 3시에 『대한독립만세』 라 대서한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연호하면서 큰 길과 성둑으로 행진하였으며 그 곳 주재소를 습격, 파괴하는 등 활동을 벌이다가 이를 탄압하는 일본군경과 일진일퇴의 공방전이 벌어진 끝에 주동자의 한사람으로 피체되었다.
그리하여 그 해 4월 24일 부산지방법원 울산지청에서 소위 보안법 위반으로 징역 1년 6월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그의 공을 기리어 1994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